비싼 필터는 값을 할까요 — 필터에도 돈을 쓰는 시대

2020년에 처음 들어온 스페인 필터 씨바리스트는 한 장에 450원으로, 하리오 필터의 열 배였습니다. 그 값을 한 장 값이 아니라 커피 맛이 얼마나 달라지느냐로 따져 본 이야기입니다. 매장에서 같은 커피를 두 필터로 내려 본 결과, 약하게 볶은 커피에 빠른 필터가 왜 쓸모 있는지, 린싱으로 종이 맛을 덮지 않는 이유를 정리했습니다.

Publisher: EL CAFE Coffee Roasters

종이 필터를 넣은 두 드리퍼와 핸드드립 주전자.

종이 필터를 사용하는 핸드드립 추출 장면. 본문의 씨바리스트 비교 시험과는 별개의 자료 사진입니다.

필터 한 장에 450원이면 비싼 걸까요. 2020년 봄에 스페인에서 만든 씨바리스트라는 필터가 국내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저는 그 계산을 한참 했습니다.

인스타에 뜨자마자 사 봤습니다

이름부터 좀 웃겼어요. 처음 보고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름이 씨바리스트라니요. 나중에 영상으로 편집해서 올릴 때 진짜 삐 처리를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름이 참 거시기해요. 스페인에서 만드는 필터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고 있다가 국내에 처음 수입돼서 인스타에 올라오자마자 궁금해서 바로 샀어요. 100장에 45,000원, 한 장에 450원 정도였습니다.

뜯어 보니 마감은 나쁘지 않았어요. 재질도 약간 반들반들하고요. 다만 커팅할 때 칼날이 좀 안 좋았나, 절단면 끝부분에 보풀 같은 게 좀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피 내리는 데 지장은 없는 위치여서 신경 쓰이지는 않습니다.

설명을 보니 아바카라는 식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었어요. 저도 처음 듣는 거라 그 자리에서 구글 검색을 해 봤더니 마닐라삼이더라고요. 종이는 스페인에서 얇고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하고요.

그때 필터 값을 나란히 놓아 보니

그때 필터 값을 하나씩 찾아봤습니다. 아래 값은 모두 2020년 기준입니다. 지금은 값이 달라졌을 거예요.

하리오 필터는 한 장에 34원 정도였습니다. 저희는 하리오 필터를 안 썼어요. 종이 맛이 너무 많이 나서요. 엘카페에서 쓰던 킨토 필터는 8컵용 60장에 8,000원, 한 장에 130원 정도. 킨토도 비싼 편이었죠.

케맥스 필터는 제가 한 장에 400원쯤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찾아보니 100장에 17,000원, 170원이었습니다. 필터가 비싸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제 기억 속 값이 두 배 넘게 부풀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씨바리스트는 하리오의 열 배쯤, 킨토의 세 배쯤 됩니다. 예전에는 케맥스 필터가 비싸다고 말이 많았는데, 이제는 필터에도 돈을 쓰는 시대가 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필터 값을 따지는 기준은 이렇습니다. 킨토가 한 장에 130원에서 150원 정도인데, 커피 맛이 100원어치 이상 좋아진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살 만한 필터예요. 커피 친구들한테 킨토를 몇 장 나눠 줬더니 다들 한 팩씩 사더라고요.

450원은 아무 커피에나 쓰기엔 부담이 있죠. 그래도 특정 커피에서는 충분히 돈값을 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같은 커피를 두 필터로 내려 봤습니다

매장에서 같은 커피를 킨토와 씨바리스트로 나란히 내려 봤어요. 꼼꼼한 실험은 아니고 대충 부피만 맞춰서 내린 거예요.

물 빠지는 게 확실히 달랐습니다. 킨토는 하리오보다 좀 두꺼워서 원래 약간 느리게 빠지는 편인데, 씨바리스트는 엄청 빨라요. 같은 레시피로 했을 때 30초 정도는 더 빨리 끝났습니다.

농도는 킨토 쪽이 약간 더 높게 나왔고, 맛은 씨바리스트 쪽이 좀 더 브라이트한 노트로 나왔어요. 종이 맛은 둘 다 거의 안 났습니다. 킨토는 면이 들어간 필터고, 씨바리스트는 아바카로 만든 필터라서 그런 것 같아요.

맛있다 맛없다를 떠나서, 레시피를 잡을 때 쓸 만하다는 의미는 충분히 찾을 수 있겠더라고요.

빠른 필터가 필요한 커피가 있습니다

너무 약하게 볶아서 미분이 많이 나와 추출할 때 막히는 커피들이 있죠. 약하게 볶은 커피는 성분이 잘 안 나와요. 그래서 분쇄를 가늘게 갑니다. 그런데 가늘게 갈면 미분이 많아져서 물이 잘 안 빠지고, 추출 시간이 길어지면 우디한 맛이 올라와요. 그렇다고 굵게 갈면 시큼해지고 커피 특징도 안 나옵니다. 추출 수율은 올려야 하는데 추출 시간은 빨라야 하는 거죠.

주름 종이 필터 안의 커피층에 주전자로 물을 붓는 모습.
종이 필터에 물을 붓는 모습. 필터와 추출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 사진입니다.

우디한 맛은 과다추출 때 나온다고들 하는데, 제 경험상으로는 과소냐 과다냐보다 시간 문제일 때가 많더라고요. 물하고 닿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디한 노트가 나올 확률이 높아져요. 약하게 볶은 커피는 반응이 덜 돼 있어서 목질이 좀 많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차피 커피도 나무잖아요. 미디엄 로스팅 이상은 우디한 맛이 잘 안 나는 편입니다.

유속이 빠른 필터는 좋은 해결책이 됩니다. 물이 잘 빠지니 더 가늘게 갈면서도 좀 더 빠르게 커피를 내릴 수 있어요. 스틱으로 젓지 않아도 물이 잘 빠지니까 매장 동선의 효율성이 좋아지고 설거지에서도 편해집니다. 요즘 노르딕(울트라라이트) 스타일로 볶는 곳이 많아졌잖아요. 그런 트렌드에 맞춰서 나온 제품이 아닌가 싶었어요.

대신 천천히 내리고 싶은 분한테는 안 맞을 수 있습니다. 두 장 겹쳐 쓰면 되지 않느냐고 물으시는데, 그래도 되긴 해요. 그러면 필터값만 천 원 가까이 됩니다. 무조건 이게 최고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린싱으로 덮지 않으려고 필터에 돈을 씁니다

저는 필터를 린싱해서 쓰는 동선을 좋아하지 않아요. 종이 필터 질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린싱을 해야 하는데, 시간도 잡아먹고 여러 가지로 비효율적이거든요. 그래서 린싱을 안 할 방법을 최대한 고민하고, 필터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민감도가 다르니까 그래도 종이 맛이 난다고 하실 수 있어요. 그런데 린싱 안 해서 종이 맛이 나는 필터는, 솔직히 린싱을 해도 종이 맛이 나요. 될 수 있으면 린싱을 안 해도 종이 맛이 최대한 덜 나는 필터를 쓰시길 추천합니다.

아쉬운 게 하나 있었어요

포장에 1~4인용이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하리오 02 사이즈에 딱 맞게 나왔습니다. 1인용 드리퍼에 쓰면 많이 삐져나와요.

오가닉이니 지속가능성이니 하는 얘기는 다 좋은데, 그럼 01 사이즈를 같이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1인용에 큰 필터를 쓰면 버려지는 종이 면적이 작지 않거든요. 환경을 생각한 제품이라면 그게 취지에 더 맞았을 것 같아요.

포장에 빨간 글씨로 FAST라고 적혀 있었어요. 추출이 빠르다는 뜻이겠죠. 스페셜티 커피 프로 필터라는 문구도 있었는데, 그건 좀 과장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저렇게 써서 나왔으면 다들 한마디씩 했을 거예요.

그래도 재미있는 필터가 나왔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쯤 써 볼 만한 필터입니다.

지금 엘카페는 하리오 V60에 카펙 아바카 필터를 씁니다. 아바카를 함께 넣어 만든 필터예요.

필터 값을 보실 때는 한 장이 얼마냐보다, 그 한 장이 커피 맛을 얼마나 바꿔 주느냐로 따져 보세요.


▶ 원본 영상: 「씨바리스트(sibarist) 커피 필터, 욕이 안나오는 커피 필터」(엘카페양사장 · 2020-05-31) https://www.youtube.com/watch?v=EfuPXm-JJXY

📌 다음 편 — 드리퍼 사이즈를 알면 레시피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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